배낭을 꾸리는 일

나의 아이맥에서 윈도우 시스템이 고장이 난 덕분에, 1년 정도 무심하게 쌓아둔 자료들을 날려먹고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어떤 강연을 위한 준비를 며칠 동안 했다. 다 되어 있는 자료 때문에 수락한 일이었건만, 했던 일을 다시 하는 기분, 영 좋지가 않았다. 어찌나 하기 싫었는지. 오랫만에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는 경우라서, 며칠 정도 유랑하기 위해서 배낭을 꾸렸다. 강의자료들을 USB에 담고, 낯선 장소를 지도에서 찾아보고 시간과 거리 같은 걸 따져보고, 기차표를 예약하고, 그리고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고  배낭을 꾸렸다. 그 도시는 부모님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곳이다. 부모님께 함께 가자고 말씀드릴까 하다가, 번거로워서 관뒀다. 모시고 가서 그들이 첫날밤을 보낸 호텔 앞에서 사진도 찍어드리고 함께 온천도 즐기면 어떨까 상상만 해보았다. 짧은 일정이어도 집을 떠나는 일은 무언가 사람 마음을 부산하게 한다. 나의 부재에 대해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준비들을 미리 해두기도 한다. 욕실장에 타올을 쟁여놓는다거나, 휴지통을 비운다거나, 빨래를 걷어 차곡차곡 갠 후에 서랍에 넣는다거나, 화분에 물을 흠뻑 준다거나. 그러고 나서도 괜히 집안 여기저기를 서성댄다. 마지막으로 배낭에 넣을 책 한 권을 고르고, 빈 노트 한 권을 챙긴다. 그리고 연필들을 깎아둔다. 내가 기차를 탔을 때 눈이 펑펑 와준다면. 돌아다니다 쉬기 위해 들어간 서점에서 괜찮은 책을 발견한다면. 기똥찬 노을 속에 총총이 집으로 들어가는 낯선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기분좋은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소소한 기대들이 집 떠나는 마음 뒤켠에 깔린다. 시인 정지용이 말했던 離家樂. 집 떠나는 즐거움. 사실은 어쩌면 즐거움이 아니라 불안일 수 있다. 기분 나쁘지 않은 불안. 어쨌거나 마음의 평정이 깨지는 상태. 그 균열과 흔들림을 낯섦으로 채워넣는 거. 

어제는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올해의 마지막 낭독회를 했다. 김민정 시인은 귀여웠고, 최하연 시인은 든든했고, 김경주 시인은 고마웠다. 김경주 시인이 그 좋은 목소리로 내 시 한 편을 낭독했다. 가면을 쓰고서. 그의 목소리로 들었던 나의 시는 괜찮았다. 예측하지 못한 깜짝 선물에 대해 그에게 고맙다는 말도 못했고, 오늘 그의 시상식에도 못 갔다. 끓여둔 생강차를 따라마시며, 칼칼한 목을 달랜다. 이제 잠을 잘 차례. 

철학자

며칠 전 우리집에서 이틀을 머물다 간 후배와 대화 중에, 그는 모리스 블랑쇼가 좋다고 말했다. 닮았다고 생각한다고. 그의 꿈들을 들어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모서리 앞에서 어떤 실패를 하게 될지, 기우처럼 어떤 염려 비슷한 것을 하게 되는 대목들이 특히 더 모리스 블랑쇼의 실패들과 비슷한 느낌이기에, 그가 그 자신을 참 잘 안다고 생각됐다. 우리는 이어서, 생애에 영향을 준 철학자에 대한 얘기를 했고, 나는 스무살의 날들에 푸코가 나에게 잘 맞았다고, 그는 마치 맘이 잘 통하는 애인과 같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나에게 "왜냐면... 그는 거만하거든." 그가 거만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의 모순을 껴안고 그걸 푸는 방식에 대해서 표독한 부분이 있었음은 인정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 이후로 나는 롤랑 바르트의 비체계적인 발견들이 예뻤고, 벤야민이 좋았고 그는 든든한 아버지 같았고, 최근엔 나도 다시 블랑쇼가 나에게 조금쯤은 예언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했다. 지금 읽고 있는 한나 아렌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일기를 쓴다. 그녀는,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밑줄을 따로 칠 구절들이 없다. 그녀가 자기 생각을 기술하는 방식이 딱히 어느 구절을 밑줄치게 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지만,  그녀의 <인간의 조건>은 내가 요즘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충분히 부감해준다. 이를테면, 근대의 발견이 낳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귀결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그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가 전도된 것에 주목을 한다. 나는 여기서, 전도 이전과 전도 이후를 함께 감각하지 않고, 전도 이후에 갇힌 우리의 가치관들에 대해 주목을 한다. 그녀의 책을 마치 경전을 읽듯 마치고, (마지막 문장은 "사람은 그가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때보다 활동적인 적이 없으며, 그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외롭지 않은 적은 없다."이다) 연보를 읽는다. 연보를 읽으며, 그녀를 내 곁의 사람으로 느껴본다. (어제는 까뮈의 기나긴 연보를 읽었다.) 2000년대가 시끄럽게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책상 위에 2010년 달력을 올려놓았다. 겨울 동안 두번째 산문집을 완성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수줍음 없이 겸손 없이, 거만하게, 좀더 큰 원을 그려놓고 시작하고 싶다. 첫 산문집의 목표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의 발뒤꿈치 같은 거였다면, 두번째 산문집의 목표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의 발뒤꿈치 같은 것이길 꿈꾼다. 이번에도 인용없이, 순전히 내 말로만 책을 채우고 싶다. 내 말의 까칠함들을 감추기 위해서 벙어리장갑 같은 시 한 편을 챕터 앞마다 또 넣을 생각인데, 거기에 쓰일 시 한 편 한 편을 미리 염두에 두는 일이 참 설렌다. 내가 쓰게 될 글보다 더.

어떤 가능성을 배제하는 일

오늘 뒤적이던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 근대의 가장 큰 잘못은 오래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박해해온 일. 새로운 것에 대해 기갈 들린 들짐승처럼 부화뇌동해온 것을 반성한다는 글. 아마도 문사 겨울호였지 싶다. 내 생각도 이와 같지만, 그래서 모더니즘의 자가당착에 대해 단호하게 등을 돌릴 수 있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왜 그러한 반성은 젊은이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불혹을 넘긴 자들에게서만 나오는가에 대해. 그것은 결국은 또다시 자기위안으로 귀결되는, 아전인수짓이 아닐지에 대해. 나이들어가면서 보수적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태도는 어떤 곳에 있을까에 대해.

'관조' 또는 명상은 영원한 것의 경험을 서술하는 말이다. 이것은 기껏해야 불멸성에나 속하는 다른 모든 태도와는 구별된다. 철학자들이 영원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마 이들이 불멸성 또는 영속성을 찾는 시민들의 가능성을 마땅히 의심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의 충격은 불멸성의 모든 추구를 한갓 헛된 것으로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고대 도시국가와 그것에 활력을 불어넣던 종교에 공식적인 반대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원성의 관심이 불멸성을 향한 다른 모든 열정에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은 철학사상 때문이 아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죽을 운명의 인간 손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이 결코 불멸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였다. 서양에서 배타적 종교의 지위를 가지고 개인의 영원한 삶의 복음을 설파하는 기독교에 의해서도 이것은 증명되었다. 이 양자는 모두 지상에서의 불멸성 추구를 헛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더욱이 이것들은 '활동적 삶'과 '정치적 삶'을 거의 완전하게 '관조'의 시녀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근대에 발생한 세속화도 그리고 이것에서 파생되는 행위와 관조 사이의 전통적 위계질서의 전도도 본래 활동적 삶의 원천이자 중심이었던 불멸성에 대한 추구를 망각으로부터 구출하지는 못했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요즘은 잠들기 전마다 예수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사료가 풍부하고 문장이 좋아서 읽는 재미가 있지만, 부러 아껴 읽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책의 뒷표지를 덮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시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시를 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언제나 시의 첫줄을 쓸 수 있는 이 난감함과 피곤함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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